풍수 기초

무학대사와 한양 천도, 도읍은 어떻게 정했을까요?

햇살이 비치는 인왕산 소나무 숲을 따라 이어진 한양도성 성곽
사진: Markus Winkler / Pexels

서울의 풍수를 찾다 보면 무학대사가 한양 터를 골랐다는 이야기와 왕십리 이름 이야기를 함께 만나요. 그런데 기록에 남은 일과 입으로 전해진 설화가 한데 섞여 있어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헷갈려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들이 각각 무엇을 적는지 나란히 놓고 견줘요.

무학대사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초」에 따르면 무학대사의 법명은 자초이고 무학은 법호예요. 1327년 경상도 삼기군, 지금의 경남 땅에서 태어나 1344년, 18세에 출가했어요.

같은 항목은 그가 원나라에서 만난 인도 승려 지공과 나옹 혜근의 법맥을 이었다고 적어요.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했고, 그는 1405년 금강산에서 78세로 입적했어요.

태조는 왜 도읍을 옮기려 했어요?

「서울」 항목은 1392년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조가 민심을 새롭게 하려고 도읍을 옮기려 했다고 적어요. 「신도궁궐조성도감」 항목은 고려의 근거지였던 개경을 벗어나려는 뜻도 함께 들어요.

같은 항목에 따르면 즉위 직후부터 이어진 천도 논의는 찬성과 반대가 거셌어요. 그래도 결국 태조의 뜻대로 도읍을 옮기기로 했어요.

계룡산은 왜 도읍이 되지 못했어요?

첫 후보는 충청도의 계룡산 남쪽이었어요. 「하륜」 항목은 하륜이 새 도읍을 계룡산으로 정하는 데 반대해 중지시켰다고 적어요. 「서울」 항목이 드는 이유는 땅이 좁고 오가기가 불편하다는 것이에요.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는 항목마다 다르게 적어요. 「서울」은 논의 단계에서 그쳤다고 하고, 「계룡산 신도안」은 『동국여지승람』을 들어 기초공사까지 하다가 물길이 멀어 멈췄고 주춧돌이 남았다고 소개해요.

「자초」는 1393년에 무학이 도읍을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 등을 돌며 풍수를 봤다고 적어요. 그리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참여했다고 한다는 말로 문장을 맺어요. 단정하지 않고 전해지는 말로 남겨 둔 셈이에요.

한양은 어떤 순서로 정해졌어요?

「신도궁궐조성도감」은 날짜까지 적어요. 1394년 8월 8일 태조가 직접 관원들을 거느리고 무악과 한양을 차례로 둘러본 뒤 한양으로 정했어요.

때일어난 일적은 항목
1393년계룡산과 한양 등을 돌며 터를 봄「자초」
1394년 8월태조가 무악과 한양을 둘러보고 한양으로 정함「신도궁궐조성도감」
1394년 9월궁궐을 지을 임시 관청을 세움「신도궁궐조성도감」
1394년 10월도성이 다 되기 전에 한양으로 옮김「신도궁궐조성도감」
1395년 9월경복궁 완공「신도궁궐조성도감」
1396~1398년도성을 쌓고 사대문을 세움「서울 한양도성」

같은 항목은 그 관청의 관원들이 권중화, 정도전 등과 함께 한양을 둘러보며 종묘와 사직, 시장과 도로의 터를 정했다고 적어요. 경복궁 터도 이때 정해졌고,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어요.

이 항목에는 무학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요. 「서울」 항목은 정도전과 승려 무학을 보내 한양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고 적어 무학을 이 일에 넣어요. 「자초」와 「서울」은 무학을 한양을 둘러본 일행으로 적지만, 터를 정한 사람으로 무학 한 사람을 꼽는 기록은 이 글이 읽은 항목 가운데 없어요.

「서울」 항목은 그 뒤 이야기도 덧붙여요. 정종 때 도읍이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가 태종이 한양으로 되돌렸고, 그 뒤로 조선 500년의 도읍이 됐다고 해요.

왕십리 설화는 무슨 이야기예요?

「무학대사 설화」는 민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학 설화가 이성계와 얽힌 이야기라고 적어요. 그 가운데 하나가 '무학을 꾸짖어 깨우쳐 준 농부' 이야기예요.

  1. 무학이 한양에 대궐을 지으려 했지만 지을 때마다 무너져요
  2. 논을 갈던 노인이 소에게 무학보다 미련하다며 꾸짖어요
  3. 노인은 한양이 학의 터라서 성부터 쌓아 날개를 눌러야 한다고 일러 줘요
  4. 그 말대로 하자 대궐이 다 지어지고, 노인은 삼각산 산신령이었다고도 해요

같은 항목은 이 이야기가 노인이 "십 리만 더 들어가라"고 일러 줘 좋은 터를 찾았다는 왕십리유래담으로 바뀌어 전하기도 한다고 적어요. 왕십리라는 땅이름이 무학과 함께 이야기되는 까닭이 이 설화예요.

설화의 순서는 기록과 반대예요. 설화에서는 성을 먼저 쌓아야 대궐이 섰지만, 앞의 표처럼 경복궁은 1395년에 다 지어졌고 도성은 1396년에 쌓기 시작했어요.

설화는 왜 무학을 앞에 세웠을까요?

「무학대사 설화」는 이성계와 얽힌 설화들이 조선 건국을 하늘의 뜻에 따른 정당한 일로 보이게 하려는 지배층의 뜻을 담고 있다고 풀어요. 「자초」도 무학이 풍수도참에 밝은 승려, 신이한 승려로 여겨지고 조선 건국을 내다본 공로자로 인식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라고 적어요.

그러니 무학 이야기는 두 겹으로 읽으면 편해요. 기록 속 무학은 태조가 존경한 왕사이자 천도 길에 함께한 승려이고, 설화 속 무학은 한양 터를 알아본 인물이에요. 『무학비결』처럼 그의 이름이 붙은 책도 「자초」는 위서 논란이 있다고 적어요.

그 터를 풍수지도로 보면 어떻게 나와요?

한양의 네 산이 어떤 짜임을 이루는지는 좌청룡 우백호에서 풀었어요. 그 짜임 한가운데 앉은 경복궁은 풍수지도에서 궁 영역 안 가장 좋은 지점을 기준으로 A 등급이에요. 궁궐마다의 결과는 서울 궁궐 풍수 글에 모아 두었어요.

풍수지도는 다섯 기준을 현대 지형 데이터로 옮겨 50m 칸마다 점수를 내요. 무학이 무엇을 봤는지 되살리는 계산은 아니고, 전통이 터를 고르던 기준을 지금의 땅에 다시 대 보는 계산이에요.

기록과 설화, 한 번 더 가르면

태조는 1394년 8월 무악과 한양을 직접 둘러보고 한양으로 정했고, 그해 10월 도읍을 옮겼어요. 무학은 천도 길에 함께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글이 읽은 항목에 터를 혼자 정했다는 기록은 없고, 왕십리 이야기는 설화예요. 우리 집 주소를 넣으면 궁궐과 같은 기준으로 잰 결과를 볼 수 있어요.

자주 묻는 질문

왕십리라는 이름은 정말 무학대사에게서 왔어요?
「무학대사 설화」는 왕십리유래담을 무학 설화가 바뀌어 전하는 이야기로 소개해요. 땅이름의 실제 유래를 확정한 기록은 이 글이 읽은 항목에 없어요.
경복궁 터는 무학대사가 정했나요?
「신도궁궐조성도감」은 궁궐을 지으려고 세운 관청의 관원들이 권중화, 정도전 등과 함께 경복궁 터를 정했다고 적고 무학의 이름은 적지 않아요. 무학은 「자초」와 「서울」 항목에서 한양을 둘러본 일행으로 나와요.
무학대사는 정도전과 사이가 나빴나요?
이 글이 읽은 항목들은 두 사람의 다툼을 적지 않아요. 둘이 함께 한양의 형세를 살폈다는 문장만 「서울」 항목에 있어요.

우리 집 터는 어떨까요

주소를 넣으면 50m 칸 단위로 산세와 물길을 읽어 드려요.

우리 집 풍수 보기

참고한 자료